어느 성도가 “우리는 열매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될까요?
아니면 모소대나무와 같이 잘 자라날까요?”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질문을 한 이유는 제가 지난주에
“우리의 마음 밭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꾸었기에 앞으로 모소대나무와 같은 성장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 말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 소망교회는 무화과나무가 될 것 같습니까 아니면 모소대나무와 같이 될 것 같습니까?”
만일 모소대나무와 같이 될 것 같다면,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자동적으로 되는 것인가요? 아니면 필요한 그 무엇이 있나요?
예수님으로부터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라는 평가와 ‘말라서 죽는’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통째로 외웠고, 날마다 기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라는 평가와 심판을 받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말씀을 본다는 것은 첫째, 정체성을 올바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내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자,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앎으로써 해결이 됩니다.
말씀을 보는 두 번째 이유는 삶의 목적을 올바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올바로 알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닌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것이 삶의 우선순위가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영혼구원해서 제자를 세우는 일의 중요성을 알고,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이는 내 인생의 종착역이 이 세상도 죽음도 아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실패는 삶의 목적과 방향성의 실패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해도 순종이 목적이 아니라
성공이 목적이 되다보니 기도를 해도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기도만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집(교회)은 자기이익만을 위하는 강도 같은 이들이 모인 곳이나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영혼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보는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보는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내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맞는 말 같지만 이것은 엄청난 오류이며, 함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소망인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갈등이나
실패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주된 원인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자”고 하는 ‘나의 결심과 노력’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헌신’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누가 나를 하나님 말씀대로 살게 하는가?”가 하는 헌신의 동력이 더 중요합니다.
‘나의 결심과 노력’은 하나님 자녀답게 살고자 하는 애쓰는 나를 번번이 무너뜨리지만,
‘주님의 은혜’는 무너지고 넘어지는 나를 언제나 세워주십니다.
‘말씀을 본다’는 것은 말씀 속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본다는 것은 은혜와 사랑, 능력과 축복이 가득하신 하나님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분과 눈을 맞추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그분의 은혜와 능력에 나를 맡기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고, 시키시는 것을 믿음으로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소대나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고 동행하는 나무입니다.
우리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될까요? 모소대나무가 될까요?~♡